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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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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만남
  • 서다민
  • 승인 2022.10.27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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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강경범 교수.
강경범 교수.

[동양뉴스]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용기 있는 나를 찾고 싶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살아오면서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유능하고 거칠기만 했던 감독이 세월이 흐르면서 지도指導에 온순해지는 문제나, 매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시합이 종료되었음을 암시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용기 하고는 다소 차원이 다르다. 그렇지만 오늘도 용기 내어 우리는 각자 세월 속에 묻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요즘 들어 무엇을 잊어버리는 횟수가 빈번하다. 혹시 건망증이 온 것일까. 몸과 마음도 노화되는 이 시점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덧없이 신세만 한탄한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옛 속담에 “부아멱삼면負兒覓三面”이라는 말이 있다. 들처 업은 아기를 앞과 양옆 등 이리저리 삼면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이곳저곳 신체의 기능마저 점점 떨어지고 아는 것도 잊혀져 가는 마당에 그깟 건망증이 무슨 대수인가 하고 마음을 추슬러 본다.

올해 들어 조그만 계간지의 모임에 장을 맡으면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글쟁이들의 모임이라서 그런지 탈도 많고 말도 많다. 특히 만남의 윤리倫理에 있어 행동行動이 따르지 않는 죽은 양심良心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연유로 지극히 주관적인 필자筆者의 시점에서 바라보니 요즘 들어 보이는 글들 또한 그 속내에 담고 있던 여유마저 놓아 버린 지 오래된 느낌이다. 어쩌면 그저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감성을 전하는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날 인가 올바른 가치價値적립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글은 엉망이 되어 가도 바로 잡지 못하는 현실로 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시대가 변한 탓일까 아니면 조그만 전자기기 속 삶에 갇혀 버린 날들이 오래되었기 때문이었을까 “50세 지천명地天命은 하늘의 뜻을 알고 있다” 하였고, “60세 이순耳順은 듣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하였지만, 정작 불혹不惑(40세)의 나이를 힘겹게 넘어왔다고 자부自負하였지만. 미혹에 사로잡혀 지금도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있음은 아닐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는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리면 각자의 배역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자기의 인생과 위치가 달라져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공존의 존재임에도 행복과 실패 앞에서의 우정은 그 징후가 지난날과 다르게 나타난다.

수많은 사회적 관계.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삶이 활성화되며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만남을 통하여 스스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에게 관대하며 반성의 고삐를 늦춰 서는 안되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이끄는 세상 속에서 정작 가면 속에 드리워진 자신의 모습을 뒤로한 채 눈앞의 사욕私慾에 잡혀 눈치를 보며 기회를 엿보는 가엾은 영혼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아닐는지, 훗날 용서의 가치마저 아까운 세상으로 변하여 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눈물이 눈 속의 먼지를 씻겨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가.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며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시인 보이티우스(Boethius)의 “고통에서 배우라”는 말이 있다. “행복은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불평은 언제나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한 번도 고통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은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 우리도 사회적 관계의 여러 상황에 따라 고통을 감내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힘찬 도약의 날갯짓으로 씨 뿌려 소중히 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이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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