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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명의 순교자 피가 흐르는 한국 최대 순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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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명의 순교자 피가 흐르는 한국 최대 순교지
  • 김재훈
  • 승인 2011.07.27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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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기독교성지2. 영광 염산교회
광주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불과한 서남해안의 한 작은 어촌마을.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설도마을. 서해안 작은 어촌 설도항에 위치한 염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인 77명의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그 순교자들은 북한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찬송을 불렀다. 후손들은 그 가해자들을 사랑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한국 기독교의 순교신앙과 예수님 사랑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세계적인 기독교 순교 유적지로 손색 없는 곳이다.
 
 1939년 8월 허상 장로(당시 전도사)에 의해 설립된 염산교회는 2대 원창권 목사에 이어 3대 김방호 목사가 시무 중이었다. 김방호 목사는 경북 경산 출신으로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 운동가였다. 만주로 피신해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중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가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벽지와 오지만을 섬기면서 1950년 3월 10일 염산교회에 부임했다.
 
 그의 부임 이후 염산 교회는 날로 부흥 발전했다. 그러나 6.25가 나고 공산군이 이곳에 진입하면서 교회당과 목사관을 강제로 빼앗아 가자, 김 목사는 교인들의 가정을 전전하면서 비밀 예배를 진행했다. 그해 9.28 서울 수복이후 국군과 UN군이 나주와 함평을 거쳐 영광읍내로 진격한다는 소문을 듣은 이 지역 기독청년과 우익청년들이 영광서 열리는 만세 환영대회를 주도했다.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공산군 잔당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시작했다. 그 해 10월 7일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기삼도(당시 목포 성경학교 학생)는 죽창에 찔러 불타는 교회 앞에서 순교 당했고, 동료 노용길 등 3명은 새끼줄에 굴비처럼 묶여 돌멩이를 매단 체 교회 옆 바다 속에 수장됐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은 노병제 집사 부부 및 어린 자녀들을 포함해 9명 모두가 똑 같은 방법으로 바닷 속에 참살됐고, 동생 가족 도 모두 참살됐다. 노 집사는 찬송을 부르며 먼저 뛰어 내렸다. 모두 22명의 일가족이 굴비처럼 엮여서 수장된 것이다. 시체들은 썰물을 따라 바다 위에 떴다가 가라앉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가 보이지 않은 하늘과 바다가 닿는 수평선위에 멈추었다.
 
13일에는 허상장로 부부가 가까운 산골짝에 죽창에 찔리고 스테반처럼 돌무더기에 깔려 숨졌다. 허 장로는 숨이 끊어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후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군은 이 지역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고 수장시켰다. 죽음을 앞두고 어린아이가 칭얼대며 울자 업고 있던 언니가 “ 울지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단다”라고 달래기도 했다. 어린아이까지 신앙의 정조를 굽히지 않고 당당게 순교를 당했다.
이후 가정집에서 비밀예배를 계속했던 김방호 목사도 10월 27일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일가족 8명이 모두 순교를 당했다. 공산군은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장작으로 때려 죽이면 너희들은 살려주겠다는 등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려 했으나 자녀들은 도리어 “주님, 주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교의 영광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김 목사도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절대로 이들을 미워하지 말라, 이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 라고 외치고 찬양을 부르며 피를 토하고 순교했다. 또 2대 목회자인 원창권 목사도 영광에서 순교함에 따라, 염산교회는 1,2,3대 교역자 전원이 순교하는 또 하나의 비극을 맞이 했다. 전 교인의 3분의 2가 순교를 당했으나 그러나 누구하나 비겁한 모습이 없었다. 모두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순교를 당했다.
 국군에 의해 완전해 수복된 1951년 2월 24일 수요일 밤. 살아 남은 자들이 목사관에서  첫 예배를 가졌다. 몰래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성경책과 마루광 항아리 속에 숨겨 두었던 찬송가를 들고 한겨울 추위도 잊은 채 타버린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이 마을 신학생으로 겨우 난을 피한 안종렬 전도사가 인도한 그 예배는 눈물과 통곡으로 진행됐다. 안 전도사는 순교한 교인들의 시신을 찾아 매장하는 일과 가족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찾아 위로 했다.
 이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됐다. 그 해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 만큼이나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순교하신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 김익 전도사가 아버지에 이어 제 4대 교역자로 염산교회에 부임한 것. 김 전도사는 부친의 순교 당시 신안 비금 덕산교회로 피신한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김 전도사가 부임하자 교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의 상처받은 교인들의 가정, 특히 공산군에게 가족을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성도들 가정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위로했다. “저는 가족을 다 잃은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입니다” 라고 시작하는 그의 차분한 음성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소문이 나면서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니 그렇게 가족들을 다 잃고도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교의 진리가 아니겠느냐“고 자문자답했다.
 
공산군에 부역하거나 동조해 교인들을 순교하게 한 가해자들은 김익 전도사의 행동거지를 숨어서 살폈다. 그러나 김익 전도사는 아버지 김방호 목사의 성업을 완수하고 부모와 형제를 죽인 가해자들을 용서하기 위해 염산교회에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가해자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했다. 이곳 바닷가 마을에서는 부모를 욕되게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질 당했다. 그는 부친을 비롯한 교인들을 학살하는데 가담했거나, 협력한 죄익 인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용서와 사랑의 심정을 보냈다. 부모를 죽이고 가족을 처참하게 죽인 가해자들을 모두 용서한 것이다.
 
김 전도사는 매일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뿐 아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부모 형제 동포를 죽인 가해자들은 그의 뜻밖의 사랑을 받고 너무 놀랐다. 그러나 곧 진심을 알고서는 진정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사랑의 사도가 염산교회에 부임했다고 영광지역에 다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의 목회는 삽시간에 수 많은 신도들을 불러 모았다. 교회는 다시 부흥의 불로 죄악을 태워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됐다. 이후 염산교회는 사랑의 교회로 불리웠다.

그러나 김 전도사는 시력이 계속 떨어져 목회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부득이 염산교회를 잠시 사임했다. 그러나 끝내 치료하지 못하고 실명한지 11년 만인 42세의 나이로 천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후로 염산교회에서는 순교라는 단어를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다. 서로 쉬쉬 했다. 60여년이 흐른 지금은 관련자들도 대부분 사망했다. 피해자 후손과 가해자 후손들도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이러한 위대한 사역은 완전히 잊혀져 가는 듯 했다.
 
현재 염산교회의 교역자는 현재 제19대 교역자인 김태균 목사. 그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체 이 곳에 부임했다가, 바로 자신이 서 있는 땅이 엄청난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곳임을 깨달고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한국 기독교가 짧은 기간 동안 유래 없는 성장을 한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순교자의 피’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명확한 순교 신앙의 정립에 매달렸다. 자료들을 모아 종합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반발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 묻혀가던 사실은 서서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순교 기념사업도 추진해 순교공원, 순교탑, 순교체험관 등을 만들었다. 순교자 유해도 모아 교회 앞 마당 큰 묘지에 합장했다. 또 수 많은 방문객들에게 순교신앙을 몸소  체험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뿌려진 순교자의 피들은 오늘도 쉬지 않고 한국 교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그 수난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고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 라고 담담히 말하며 “1939년부터 오늘까지 복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염산교회의 순교 역사는 영원히 기독교 역사에 빛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주=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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