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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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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아버지
  • 김원식
  • 승인 2023.09.22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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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행일 시인
허행일 시인(사진=동양뉴스DB)
허행일 시인. (사진=동양뉴스DB)

[동양뉴스] 환갑이 다된 아버지의 귀밑 흰머리를 보고 '애가 무슨 새치가 다 있냐?'면서 타박하시던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고 정확히 16년을 더 사시다가 아흔 여섯에 돌아가셨다.

시간은 흘러 그 당시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버린 아버지.

당신께서는 삼남이녀의 형제 중 네 번째로 태어나셨다.

지금껏 형제끼리 다툼 한번 없을 정도로 화목한 가정 분위기였지만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서당을 다니셨기 때문에 그날그날 배우신 한문을 항상 종이에 쓰고 싶어하셨단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할아버지께 "꼭 오늘은 종이를 사다주세요"하고 부탁드렸지만 해질녘 동구 밖에서의 기다림은 술에 거나하게 취하신 할아버지의 빈손뿐이었다.

없는 살림에 당연히 일찍이 산업전선에 뛰어드셨다.

당신께서는 어릴 때부터 점원 노릇을 하며 배운 양복기술로 타인의 새 정장을 만들며 살아오셨지만 정작 당신의 바지에는 항상 무르팍이 해어져 기워 입은 자국이 선명했다.

묵묵히 평생을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가족은 물론이고 고향집의 없는 살림을 돌보셨다.

아버지는 또 큰집 조카들의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쇠약해진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자식들이 네 명이나 있지만 모두 제 살 길 바쁘니 할 수 없이 내린 처방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뵙고 싶어서 며칠 전 요양원엘 갔었는데, 아직도 코로나의 영향 때문에 면회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 5층 요양원 발코니로 나오시라 해서, 당신께서는 아래로 내려다보시고 나는 건물 바깥에서 위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어 버렸다.

이제 겨우 예약을 해야 하지만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면회가 허락되었다.

오늘도 나는 한 통의 안부 전화를 드렸지만 당신께서는 두 통의 전화를 더 주셨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지우개가 서서히 생기나보다.

금방 전화하신 것도 기억을 못 하시고 또 전화를 주신다.

장남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해 드렸는데 첫 정이 그렇게도 그리우신가보다.

그런 아버지의 세월 속에는 술잔이 절반이셨지만 그 술잔 속에는 희생이 절반이셨다.

평생 고고한 학처럼 묵묵히 살아 오셨지만 당신의 마음 속에는 바다가 있었다.

오래 전 할머니의 타박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던 소년은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태산같이 높은 어버이의 은혜를 당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못난 아들이었다.

삶에 쫓겨 앞만 바라보고 살다가 이제 자식 사랑의 깊이를 느껴 효를 행하려 하니 아버지의 기력이 다하셨다.

그 흔한 비행기 한번 태워 드리려 해도 힘이 없어 여행을 못 한다고 한다.

평생을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편찮으셔도 아프다는 말씀 한번 안 하셨다.

후회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 나머지 빈잔에 큰아들의 못 다한 효를 채워 드릴 테니 할머니처럼 앞으로 16년만 더 살다 가소서.

이번 추석 명절에는 오랫동안 뫼실게요.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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