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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대구 십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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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대구 십일미
  • 김원식
  • 승인 2023.11.24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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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행일 시인
허행일 시인(사진=동양뉴스DB)
허행일 시인. (사진=동양뉴스DB)

[동양뉴스] 전국 어느 곳을 가든 그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다.

지역의 대표음식은 지역의 특성과 환경에 따라서 생겨난 향토음식이다.

대구도 전국적으로 음식문화와 향토음식이 가장 발달한 고장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대구십미(大邱十味)가 있으며 곳곳에 경쟁력 있는 먹거리 타운이 활발하게 조성되고 있다.

대구시 음식선정위원회가 선정한 대구십미는 대강 이러하다.

전쟁 통에도 양반이 어찌 밥과 국을 섞어 먹으랴 해서 탄생한 교동 따로국밥, 6. 25 피난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서 당면 따위를 간단하게 넣어 먹었던 납작만두, 오로지 멸치만으로 국물을 우려낸 누른국수, 1960년대 성당못 근처 도살장 인근 식당에서 소와 돼지의 부산물 요리로 처음 개발된 곱창 막창, 우동을 경상도식으로 얼큰하게 개발한 야끼우동,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 논에서 집단 양식한 저가의 메기를 매운탕으로 요리한 논메기 매운탕, 매콤달콤 반고개 무침회, 1950년대 소주 안주로 만들어진 뭉티기, 복어불고기, 동인동 찜갈비.

이들 음식은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상 10가지 중에서 아마 한 가지를 더 선정하라면 평화시장 닭똥집도 뽑혔지 않았을까?

이는 평화시장 닭똥집만큼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닭똥집 튀김과 평화시장의 만남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 이후 경부선의 수송량 증가로 넓은 부지에 많은 선로를 확보한 역이 대구에 필요해졌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신암동에 1969년 동대구역이 생기면서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평화시장이 생겼다.

한 동안은 칠성시장에 버금갈 정도로 큰 시장이었지만 이 역시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평화시장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때 평화시장을 살린 것이 닭똥집이다. 

지금은 장사를 그만 둔 이두명, 나춘선 부부가 1972년 평화시잠 삼아통닭 자리에서 도계업을 했었다.

그 무렵, 시장 닭똥집 골목 간판이 있는 도로변에 요즘은 구경할 순 없지만 매일 아침 인력시장이 섰었다.

추운 겨울날, 모닥불을 드럼통에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나타난 봉고차가 공사 현장에 필요한 만큼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선택을 받은 사람은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시장에서 낙심한 마음을 막걸리로 달랬어야 했다.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 사정에 그들에게는 안주는 사치요 그렇다고 막걸리로만 낙심한 마음과 배를 채울 수 없었기에 이들 부부는 마땅히 쓸 곳은 없지만 버리기 아까운 닭똥집을 밀가루를 바르지 않고 그냥 튀겨서 서비스 안주로 주었다.

이것이 닭똥집 골목의 시초였다.

서비스 안주로 나가던 것이 반응이 좋아지자 이들 부부는 닭똥집에 밀가루를 발라 한 접시를 천 원에 판매하였고 어느새 삼아통닭은 서민들의 목로주점으로, 닭똥집은 서민들의 음식으로 변해 갔었다.

지금은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도 현대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십 여 전만 해도 좌대에 앉아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정을 나누던 그런 장소였다.

이처럼 평화시장의 닭똥집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대구의 대표음식이다.

대구의 십일미이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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