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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동행(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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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동행(同行)
  • 서다민
  • 승인 2024.01.27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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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강경범 교수.
강경범 교수.

[동양뉴스] 서다민 기자 = 삶의 현장에서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권력(權力)과 자본(資本) 앞에서 예의(禮儀)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세상은 상식(常識)을 넘어 어지럽고 도처에 탐욕마저 넘쳐난다.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인간미는 피폐(疲弊)해지고 인심은 갈수록 각박해진다. 현대문명과 문화적 소산속에 고층 건물들이 하늘을 찌르고 교통망은 뻗고 있으며 각종 정보의 홍수 속에 묻혀 있으나 정작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며 의식의 수준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한파가 닥친 이겨울 집안 온도를 높여 등 따습게 잘 수 있으나 어려운 사정에 처한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은 냉랭하기만 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상이 각박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학벌(學閥)은 높아졌지만 학식(學識)은 낮아지며 메말라가고 있는 현실속에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을 성찰하면서 올곧은 방향을 찾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인생을 살아오며 한순간 벼랑 끝에 내몰린 적이 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 마져 기승을 부리고 있는 슬픈 현실 속에서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봐도 기실 좀처럼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춥고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가슴속에 따뜻한 마음과 푸근한 인정(人情)을 불어넣은 기회가 있었기에 난관(難關)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덧 갑진년 1월의 끝자락에 다가섰다. 어려웠던 삶의 현장에서 끝없이 노력하며 굴레를 벗어나려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해준 인생 이야기 중 동행(同行)을 다듬어 보려 한다. 어쩌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삶 속에서 그 실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 끊임없이 강조되는 것. 그 중 하나는 동행(同行)이 아닐까. 함께라는 수식어 앞에서 이루어지는 싸움 그 실체의 이면에 만약 질투와 이기심, 탐욕과 투쟁이 존재한다 하여도 그것은 승패가 없는 일종의 아름다운 경기일 것이다. 어릴 적 소꿉놀이하던 친구와 손잡고 다짐했던 그 순간을 시작으로 노랫말 가사처럼 목로주점 호롱불 밑에 마주 않아 텁텁한 막걸리 한잔에 개똥철학을 논하며 주고받았던 그 말 “우리 평생 함께하자 친구야”. 고령(高齡)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흔적을 뒤돌아본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의 불씨를 켜주며 허물을 덮어주고, 설령 아픔이 있다 하여도 아픈 상흔(傷痕)속에 그늘막이 되어주고, 때론 노력하고 발버둥쳐봐도 좀처럼 헤어나지 못할 때 등을 내주며 쉼터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나의 지지대 역할을 감당해 주는 조연자(助演者)의 모습이 아름다운 동행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겠다.

오늘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동행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겠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심신을 휴식하며 인내와 고통을 감수하는 것보다 이제 만남을 통하여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더욱 사랑하고 존중하며 이해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 크고 작은 나사못이 비록 한 개라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그 기계(機械)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며. 인재를 등용하는 문제 또한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자리를 배치하기 위함일 것이다. 단절된 삶이 아닌 주연(主演)으로 아니면 조연(助演)으로서의 아름다운 동행을 시작하자. 나의 존재(存在)를 값지게 여기고 타인 또한 동등하고 공정하게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상대가 반갑게 웃으면 왜 이렇게 친절할까 의아(疑訝)해하고 경계심(警戒心)까지 가지게 되었던 지난 시간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하나가 있으므로 둘이 있고 내가 있으므로 네가 존재하는 것을 알아갈 때 즐겁고 감사한 하루가 될 것이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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